

1. 개요
그 시절 영국에는 두 명의 여왕이 있었다.영국의 록밴드. 프로그레시브 록, 글램 록, 하드 록, 팝 록 등 다양한 장르의 록 음악을 구현하며 록 음악과 대중음악의 발전에 기여했다. 1970년대에서 1980년대를 거쳐 1990년대 중반까지 풍미한 전설적인 록밴드이며 세대와 문화를 초월하는 독창적인 음악으로 현재까지 전 세계적으로 많은 팬을 보유하고 있다.
2. 역사
2.1. 스마일 시절
1968년, 임페리얼 칼리지 런던(Imperial College London)의 학생이였던 기타리스트 브라이언 메이와 베이시스트 팀 스태플(Tim Staffel)이 밴드를 만들기로 결정한다. 드러머가 필요했던 그들은 학교 공지 게시판에 광고를 실었고, 그를 본 치과대학(London Hospital Medical College) 학생인 드러머 로저 테일러가 밴드에 들어오게 된다. 그들은 밴드 이름을 스마일(Smile)이라 지었고, 지미 헨드릭스, 핑크 플로이드, 예스와 같은 밴드들의 콘서트를 보조하는 역할을 맡게 되었다. 그러던 중 머큐리 레코드(Mercury Records) 관계자에게서 온 레코딩 계약 제안을 받아들이게 된 그들은 머큐리 레코드사가 제공해준 트라이던트 스튜디오(Trident Studio)에서 음반작업을 시작한다.

1969년, 팀 스태플은 일링 칼리지(Ealing College)에서 미술을 전공하던 파로크 불사라(Farrokh Bulsara)를 밴드에 소개하는데, 그가 훗날의 프레디 머큐리(Freddie Mercury)이다. 다른 밴드에서 활동하고 있던 파로크(프레디)는 곧 스마일 밴드의 열성 팬이 되었고, 멤버들은 그를 ‘제 4의 멤버’격으로 대해줬다. 그러던 동년 8월, 머큐리 레코드는 스마일의 팀 스태플 작곡의 ‘Earth’와 브라이언 메이 작곡의 ‘Step On Me’ 두 곡을 싱글 발매하기로 결정하는데, 문제는 머큐리 레코드가 미국에 본사를 두고 있어 영국 쪽 유통망은 매우 허술했다는 것. 결국 싱글은 미국에서만 발매되었고 이마저도 판매량이 시원찮았다. 그럼에도 앨범 발매를 준비하던 그들이었으나, 스마일에 더 이상 가망이 없다고 생각한 팀 스태플이 스마일을 탈퇴하고 험피 봉(Humpy Bong)이라는 밴드로 자리를 옮기는 일이 일어난다. 팀이 탈퇴하자 머큐리 레코드도 그들을 버렸다. 애초에 싱글 1장 계약이라 항의조차 못했다고 한다.
난항에 빠진 밴드는 새로운 보컬을 뽑기 위해 오디션을 실시했다. 당시 프레디 머큐리는 로저와 같은 아파트에 살고 있었는데 스마일이 보컬 오디션을 한다는 소식을 듣자 처음부터 스마일과 가까운 관계였던 자신에게 먼저 얘기해 주지 않은 것을 매우 섭섭해 했다고 한다. 어쨌거나 프레디가 새 멤버로 들어왔고, 밴드 이름을 스마일에서 퀸으로 바꾸게 된다.
밴드 이름을 지을 때, 프레디는 ‘퀸(Queen, 여왕, 창녀, 게이)’를, 브라이언은 ‘그랜드 댄스(Grand Dance, 위대한 춤)’를, 로저는 ‘리치 키즈(The Rich Kids, 부유한 아이들)’를 제안했다. 사실 프레디가 제안한 ‘퀸’이라는 이름은 여왕이라는 뜻 이외에도 앞서 서술했듯 동성애자라는 뜻이 있어 당시 기준으론 매우 파격적인 밴드명이라 브라이언과 로저는 처음에 프레디의 제안이 개그인줄 알고 웃었다고 한다. 하지만 결국 밴드의 이름은 퀸으로 결정되어 현재에 이르게 된다. 왜 퀸이란 이름을 제안했는지는 프레디 본인도 까먹었다고.
베이시스트 팀 스태플의 탈퇴로 베이스 자리가 비게 된 그들은 이후 3명의 베이시스트를 거치는데, 모두 얼마 못 가 탈퇴하고, 1971년이나 되어서야 프레디의 소개로 우연히 알게 된 존 디콘이 들어오며 퀸의 라인업이 완성되었다. 참고로 퀸은 존 디콘이 들어와 라인업이 완성된 이 때(1971년)를 공식적인 결성연도로 친다.
팀 스태플은 이후 험피 봉 활동은 성공하지 못했고 음악을 그만두고 평범한 직장인이 되었다. 근데 그게 또 평범한 직장인이라고 할 수도 없는 게 음악 말고도 모형 제작에 관심이 많았던 취미를 살려서 세계적으로 유명한 영국의 어린이 애니메이션 증기기관차 토마스의 모형 애니메이션 첫 시즌에 모형 기관차 및 각종 디오라마의 설계와 제작을 담당했다.
이 결성 멤버들의 출신 배경이 좀 재미있는데, 모두 현대 기준으로도 상당한 고학력자 출신이다. 게다가 디자인 계열 출신인 프레디 머큐리를 제외하면 모두 이공계 분야이다. (로저 테일러-치과대학, 브라이언 메이-천체물리학, 존 디콘-전자공학)
한국 대학을 예로 친다면 카이스트 출신의 3명과 홍익대미대출신의 보컬로 시작했다고 봐야한다
사실 임페리얼 칼리지 런던 의 위상은 유럽의 mit 라 불리우며 공과 대학만으로 따지면 옥스포드 캐임브리치 대학보다 더 위상이 높은 대학으로 미국으로 따지면 칼텍 mit 수준의 대학이라고 볼수 있으며 브라이언 메이의 경우는 그 학교에서 결국 박사학위까지 취득하여 왕립학술원 회원에 가입할정도로 저명한 천체 공학자이다. 실제 비록 영국의 총장직은 명예직이지만 리버풀 존 무어스 대학교 총장직도 역임할 정도이다.
한국으로 따지면 카이스트 천체물리학박사1명 치과의사1명 전자공학과 학사1명 의 고학력자 밴드에 매인보컬로 홍익대나 국민대 디자인학부 졸업자가 모여 만든 엄친아 그룹이라고 볼수있다
2.2. 초기

4인조로 클럽과 대학 공연을 다니다가 위에서도 언급했던 트라이던트와 계약을 맺은 퀸은 한참 뒤 1973년 1집 Queen을 발매하게 되었다. 앨범은 상업적으론 시원찮았지만 평론가들로부터는 꽤나 괜찮은 평가를 받았고, 빌보드 차트 83위에 오르는 소소한 이변을 거두기도 한다. 이후 밴드는 ‘Mott the Hoople’이라는 밴드의 투어 오프닝 밴드를 맡게 되는데, 덕분에 팬클럽이 생기거나 앨범 판매량이 오르는 등의 많은 주목을 받게 되었지만 이때부터 이후 고질적인 문제가 되는 언론과의 갈등이 생기기 시작했다.
이듬해 1974년, 밴드는 2집 Queen II를 발매하게 되는데, 이미 꽤나 이름을 알린 그들은 이 앨범에서 첫 히트곡 ‘Seven Seas of Rhye’를 배출하게 되었고, 앨범 차트에서도 작은 성과를 내는 등 상업적으로는 분전했지만, 음악적으로는 “글램락의 찌꺼기(…)다”, “여기서 퀸이 더 발전한다면 내 모자를 먹어보이겠다”는 등 혹평 일색이었다. 그러나 호평을 던진 평론가들도 많았으며, 이후 퀸의 이름이 알려지며 재평가되었다. 퀸 마니아들에게 그 유명한 A Night at the Opera보다 더 훌륭한 작품이라는 지지를 얻기도 하는 앨범. 이후 브라이언의 건강 악화로 잠시 난항을 겪었으나 우여곡절 끝에 동년 하반기 싱글 Killer Queen이 발매되어 UK 차트 2위라는 성공을 거두었고, 이어서 발매한 3집 Sheer Heart Attack까지 상업적인 성공을 거두며 승승장구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3집 투어가 성황리에 끝난 뒤, 소속사 트라이던트와의 갈등이 심각해지는데, 그들과 맺은 계약은 애초에 문제가 많았다. 대표적으로 퀸의 음반 판권에 관한 일체의 권리를 트라이던트에 넘긴다는 내용. 이 때문에 밴드는 음반 판매량과는 관계없이 정해진 보수만을 받게 되었다. 문제는 그 정해진 보수가 20 파운드, 원화로 대략 4만원. 결국 협상 끝에 60 파운드로 인상받았으나, 문제가 많은 건 매한가지였다. 그렇게 3집 앨범과 그 싱글이 히트했음에도 멤버들은 계속 거지 신세일 수밖에 없었다. 결국 법적 분쟁 끝에 퀸은 트라이던트를 나오게 되었고, 엘튼 존의 매니저였던 존 리드(John Reid)와 만나 EMI와 직속 계약에 성공한다.
2.3. 전성기
그리고 이듬해 1975년, 퀸은 4집 A Night at the Opera를 발매했고, 앨범의 리드싱글로 6분에 달하는 대곡 Bohemian Rhapsody가 우여곡절 끝에 발매되어 영국 1위, 미국 빌보드 9위를 기록하며 퀸은 세계적인 밴드로 도약하게 된다.
이듬해 1976년, 퀸은 5집 A Day at the Races를 발매하는데, 프레디 머큐리 작곡의 Somebody to Love가 히트하며 전작의 성공이 단순한 행운이 아니었음을 입증하게 된다. 하지만 평론가들로부터는 너무 정형화되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다른 앨범의 평가에는 공감하는 사람이 적은 반면, 이 평가에는 공감하는 사람이 많은 편이다.

1977년, 6집 News of the World를 발매하고 We Will Rock You와 We Are The Champions 를 히트시킨 퀸은 펑크 록의 영향으로 여타 선두주자 밴드들이 주춤하는 사이 이 앨범의 히트에 힘입어 음악계에서 자신들의 입지를 굳혀 갔다. 그리고 이때 매니저인 존 리드와 양자 합의하에 계약을 파기하고 그들만의 기획사를 만들게 된다.

이후 1978년의 7집 앨범 Jazz는 이전의 앨범들에 비해서는 직선적이면서도 대중적인 곡들로 채워져 있었는데, 이에 대한 평단의 반응은 여전히 냉정했으며, 앨범 판매량이 1/3로 감소하는 등 상업적인 성과도 이전에 비해 시원찮았다. 하지만 밴드는 영국을 포함한 유럽, 남미, 일본 등에서 여전히 많은 인기를 누렸으며, 이 앨범에서 프레디 작곡의 Don’t Stop Me Now가 사후 재평가를 받으며 지금까지도 인기를 얻는 곡을 남기게 되었다. 그리고 이듬해 1979년, 밴드는 그 해 이루어졌던 투어 ‘Jazz’의 라이브를 추합해 밴드의 첫 라이브 앨범인 ‘Live Killers’를 발매한다.
2.4. 과도기
1980년, 밴드는 8번째 정규 앨범 The Game을 발매하는데, 처음으로 신디사이저를 도입하고 팝-펑크(funk) 지향적인 사운드로 변화를 꾀한 앨범이었다. 그 결과 앨범이 빌보드 차트 1위에 등극하고, 최초로 남미에서 투어를 한 메이저 밴드가 되는 등 인기의 정점을 맞이한다. 싱글 Another One Bites the Dust와 엘비스 풍의 컨트리 곡인 ‘Crazy Little Thing Called Love’두 곡도 빌보드 1위를 기록했을 뿐만 아니라, 프레디 머큐리의 가창력과 무대 매너는 이때 절정에 올랐다. 이 두 곡은 다양한 장르의 음악을 섭렵해서 보여주던 퀸에게도 이질적이고 특히나 컨트리, 디스코의 영향을 받은 미국색이 강한 곡이었는데, 그런 이질적인 곡조차 미국인이 듣고 미국의 밴드인 줄 알고 열심히 틀어대 빌보드 Hot 100 1위까지 만들었다는 점에서 퀸의 장르 흡인력이 절정에 달했던 시기이기도 하다.

그 후 같은 1980년 9번째 정규 앨범으로서 SF 영화 <플래시 고든>의 OST 앨범을 발매한 이후 퀸은 펑키한 ‘Another One Bites the Dust’가 가져온 성공에 고무되어 82년 10번째 정규 앨범으로 디스코풍이 매우 강한 앨범 Hot Space를 발매하는데, 너무 나도 급작스런 변화와 퀸 특유의 사운드의 부재는 팬들마저 이 앨범을 외면하게 만들었고(당시 디스코란 장르가 끝물이기도 했다), 결국 퀸 역사에 흑역사로 취급을 받는 비운의 앨범이 되고 만다. 다들 알 법한 노래 ‘Under Pressure’가 이 앨범 수록곡이기는 하나, 타가수와의 콜라보레이션 싱글로 앨범 발표 한참 전에 인기를 끌었기에 Hop Space의 실패는 치명적이었다. 너무나도 달라진 음악 색깔 때문에 팬들마저 외면한 건 사실이었고, 퀸의 인기는 내리막길로 접어드는 것처럼 보였다. 다만 위에 언급했듯이 프레디의 가창력은 이 시기가 전성기였다. 밴드는 내리막길인데 프런트맨의 가창력은 전성기였다는 것이 아이러니하다.

10번째 정규 앨범인 Hot Space 이후 2년간 활동을 쉰 밴드는 1984년, 11번째 정규 앨범 The Works 를 발매했다. 전작의 처절한 실패와는 달리 앨범은 UK 앨범 차트 2위에 올랐고, 싱글 Radio Ga Ga가 19개국에서 1위를 차지하며 퀸의 80년대 곡들 중 최다 히트곡이 되었다. 뿐만 아니라 I Want To Break Free(UK 3위), It’s a Hard Life(UK 7위)까지 무려 3곡이나 UK차트 10위 안으로 진입하며 최소한 유럽과 남미에서는 예전의 인기를 완벽하게 화복했다. 그러나 지나치게 대중성을 의식하여 락이 아닌 팝 성향이 강하다는 이유로 평론가뿐만 아니라 고정팬들조차 실망감을 드러내는 경우가 많았고, I Want To Break Free 뮤직비디오 논란으로 미국 시장에서 인기가 폭락하면서 상업적으로도 큰 타격을 입었다. 또한 이 시기 멤버들의 솔로활동이 잦았던 탓에 해체설이 파다했다.
2.5. 후기
이듬해 펼쳐진 라이브 에이드에서 퀸, 특히 프레디 머큐리는 할당된 20여분간 무대를 휘어잡으며 엄청난 퍼포먼스를 보여줬고 이때 받은 대중들의 환대, 그리고 이어진 레코드 매출 상승에 힘입어 퀸은 ‘제2의 전성기’ 를 맞이하게 된다. 라이브 에이드 공연은 2014년 영국문화원이 선정한 ‘지난 80년간 세상을 형성한 가장 중요한 사건 80가지’ 중 대중음악 분야에서는 ‘마이클 잭슨의 영향력’과 함께 뽑혔을 정도로 파급력이 컸던 것이다.

이는 86년 12번째 정규 앨범인 A Kind of Magic의 발매와 함께 전 유럽에 걸쳐 열린 매직 투어로 이어졌다. 이 투어에서만 라이브 앨범이 세 장 나왔고 7월 11일, 12일의 웸블리 공연 2회를 포함해 전 공연이 매진을 기록했다. 20만 명의 관객이 운집한 영국 네브워스 공원에서 끝을 맺게 된다. 하지만 이 네브워스 공연은 퀸의 마지막 공연이 되어버렸는데, 그 즈음 프레디가 에이즈에 걸려 건강이 악화되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네브워스 공연 이후로는 일체의 라이브 활동도 할 수 없게 된다.
2.6. 말기

3년 뒤인 1989년, 밴드는 13번째 정규 앨범 The Miracle을 발매하게 된다. 이 시기는 퀸의 멤버들에게 있어 굉장히 힘든 시기였는데, 프레디는 위에서 언급한 에이즈에 걸렸다는 소문으로, 브라이언은 스캔들 관련으로 곤혹을 치르고 있었다. 그럼에도 앨범은 매우 성공했고, 그들의 80년대 앨범 중 음악성에서는 가장 높은 평가를 받게 되었다. 이 앨범부터는 작곡가 명의를 일부 공동명의로(Queen) 바꾸게 되었고, 프레디의 창법은 70년대의 그 창법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또 프레디는 1980년부터 길렀던 콧수염을 다시 밀었다.
프레디는 자신이 에이즈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고 그때부터 음악 활동에만 전념하게 되었다. 89년의 ‘The Miracle’이 그러했다. 하지만 2년 뒤 91년에 발매된 14번째 앨범 Innuendo는 그렇게 프레디가 음악에만 전념하고도 일부분 미완성스럽다는 평을 받기도 한다. 그러나 이 앨범은 ‘Innuendo’, ‘The Show Must Go On’ 등의 명곡들이 포진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퀸 전체 커리어에서도 손꼽히는 명반으로 뽑히기도 한다. 게다가 차트에서 좋은 성적을 거둬 상업적으로도 성공했다. 하지만 여전히 프레디의 건강 문제로 투어는 불가능했으며 흑백으로 찍힌 ‘I’m Going Slightly Mad’의 뮤직비디오에 훤히 드러난 프레디의 초췌한 모습이 팬들을 불안하게 했다. 그렇게 투어는 커녕 공식 석상에도 거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자 좋은 떡밥을 낚아챈 언론이 가만 있지 않았고, 눈에 띄게 초췌해진 프레디 머큐리와 관련해 온갖 루머가 나돌게 된다.
그러던 1991년 11월 23일, 그 루머가 사실이 되었다. 결국 프레디 머큐리는 성명을 통해 에이즈 환자임을 인정했고, 24시간이 지나지 않아 사망하게 된다. (24일)
2.7. 프레디 머큐리 사후
다른 퀸 멤버들도 각자의 분야에서 인정받는 실력자들임에도 아무래도 프레디의 존재감이 너무 크다보니 과소평가 받는 경향이 있지만, 브라이언 메이와 로저 테일러는 꾸준히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92년 ‘프레디 머큐리 트리뷰트 콘서트’가 런던 웸블리 구장에서 성황리에 열렸다. 당시 전 세계 음악계에서 가장 잘 나가던 사람들이 총출동하여 퀸의 대표곡을 연주하였다. 몇 명만 나열해 보아도 <보헤미안 랩소디>를 부른 엘튼 존과 Under Pressure을 부른 데이비드 보위, 액슬 로즈, <Stone Cold Crazy>를 부른 메탈리카의 제임스 햇필드, <I Want It All>을 부른 더 후의 로저 달트리, <Crazy Little Thing Called Love>와 <Innuendo>를 부른 레드 제플린의 로버트 플랜트 등등. 블랙 사바스의 토니 아이오미가 몇몇 곡에서 백업 및 리듬기타로 참여하였다. 그 중에서도 백미는 조지 마이클의 Somebody To Love와 씰(Seal)이 부른 Who Wants To Live Forever. 그리고 퀸을 가장 잘 이해하고 존경했다고 평가받았던 익스트림의 퀸 메들리. 하지만 대부분의 게스트들은 아무래도 원곡자인 프레디를 따라올 수 없다며 좋지 못한 평을 들었다. 이후 존 디콘이 “프레디가 없으면 퀸이 아니다.”라며 퀸과 관계된 활동을 일체 접었는데, 어쩌면 이게 그 마음을 확고하게 했을지도..
이후 퀸의 나머지 멤버들이 프레디의 마지막 순간의 녹음들을 완성시키기 위해 작업한 앨범 Made in Heaven이 95년 발매되어 영국차트 1위에 오른 9번째 퀸 앨범이 되었으며, 후에 ‘Queen Rocks’라는 컴플릿 앨범에서 머큐리를 제외한 브라이언과 로저가 부른 “No One But you”라는 곡을 발매하기도 했다. 그리고 이곡을 끝으로 존 디콘이 97년 은퇴를 선언한다. 이후 브라이언 메이와 로저 테일러는 음악계에 남아 여러 게스트들과 협력하여 계속해서 퀸 활동을 이어나가고 있다. 뮤지컬 ‘We Will Rock You’를 제작하기도 했고, 프리, 배드 컴퍼니의 보컬로 활약 했던 폴 로저스와 함께 퀸+폴 로저스란 이름으로 투어를 하기도 했다. 이후 2011년에는 오랜 소속사였던 EMI가 유니버설 뮤직 그룹에 인수 합병 되면서 소속을 유니버설로 바꿨으며, 퀸 결성 40주년을 맞이하여 퀸의 전곡을 디지털 리마스터링한 앨범과 새로운 베스트 앨범 등을 내놓았다. 2011년 거의 1년 내내 기념 행사가 진행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2012년 브라이언과 로저는 아메리칸 아이돌이 낳은 초고음역대의 슈퍼스타 아담 램버트와 투어를 시작했고, 2012년 런던 올림픽 폐막식에서 제시 J와 협연하였다. 2014년 슈퍼소닉 페스티벌에 내한하여 8월 14일에 공연을 펼쳤다. 2014년 5월에 브라이언 메이가 또다른 베스트 앨범 <Queen Forever>의 발매를 예고했다. 2014년 9월에 새 라이브 앨범 <Live At The Rainbow ’74>를 발매했다. 앨범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74년 라이브에서 부른 곡들이 담겨있는 앨범인데 이 앨범에선 그때까진 라이브에서 부른 적 없었다고 알려진 Queen, Queen II의 일부 곡들이 수록되어 있어 꽤나 화제를 모았다.
2015년 9월 말경 퀸의 스튜디오 앨범 전질을 LP 디스크로 집대성한 박스셋 “The Studio Collection”이 발매되었는데, 이는 오리지널 슬리브 구성 등을 완벽하게 구성한 것으로 광고가 자자했다. 그 명성에 힘입어 국내에서는 몇 달 지나지않아 유명 사이트 대부분 품절이라는 대성공을 거둔다. 그리고 2018년 1월 9일, 퀸은 그래미 평생공로상을 받을 것이라고 발표되었다.
2018년에 전기영화 보헤미안 랩소디가 개봉했다. 그들의 수십년이 지난 지금에도 이어져 오는 인기를 가늠할 수 있다. 특히 프레디는 사실 생전에 밴드를 다룬 전기영화가 나중에 나오면 재미있을 것 같다고 말하기도 했다. 덤으로 프레디는 자신의 전기영화를 만든다면 너무 문란해서 X등급을 3개나 받을거라고(…) 말하기도. 실제로도 메리와 알몸으로 누워있거나, 퀸의 매니저인 폴과 키스하는 장면 등 선정적인 장면이 있기도 했다.
퀸의 전기영화 보헤미안 랩소디의 영화 1차 예고편이 나온 뒤 유튜브에 있는 보헤미안 랩소디 뮤비의 조회수가 갑자기 확 늘어나더니 구독자가 300만명까지 갔다가 2차,3차 예고편이 나올수록 구독자가 늘더니 영화가 나온후 2019년 7월, 1000만명을 달성했다!
2019년 아담 램버트와 ‘2019 북미 투어-랩소디’ 날짜를 발표했다. 2019년 7월 10일 벤쿠버에서 시작해 LA, 달라스, 토론토, 워싱턴DC, 보스톤, 뉴욕, 아틀란타, 샬럿을 8월 23일까지 도는 일정이다. 공연에는 브라이언 메이와 로저 테일러가 함께 한다. 브라이언 메이는 투어 소식을 발표하며 “이건 정말 대단한 기회다. 우리의 지난 투어는 엄청난 야망으로 제작됐고 우리에게 최고의 깨달음을 줬다. 그래서 우리는 더 야심찬 투어를 만들기로 했다. 기다려라 미국”이라고 말했다.
마침내 한국 내한 공연이 확정 되었다.#
2020년 1월 18일과 19일 한국공연을 했다.#
3. 음악
퀸은 하드 록(<Tie your mother down> 등), 프로그레시브 록(<The March Of The Black Queen>, <Innuendo> 등), 글램 록(<Killer Queen> 등), 팝(<Radio Ga Ga> 등), 잉글리시 뮤직홀, 포크송(’39 등), 오페라(Bohemian Rhapsody 등), 로커빌리(<Crazy Little thing called Love> 등), 심지어 디스코(<I Want to Break Free> 등) 등에 이르기까지 상당히 다양한 장르의 음악을 시도했다. 이는 전 멤버가 각기 다른 음악적 취향을 가진 작곡가였기에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 이로 인해 팬덤이나 호의적인 평론가들에게는 록을 바탕으로 다양한 가능성을 시도했던 것으로 평가받았던 반면에 비판적인 평단에서는 이도저도 아닌 잡탕 음악(슈퍼마켓 록)이라는 식의 비평을 들어야 했다(팬들은 이에 “슈퍼마켓이 아닌 백화점”이라고 대응했다).
서구의 대중음악 비평은 블루스와 록을 중심으로 하는 계보적인 측면을 중시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록의 역사에서 해당 뮤지션이 어떠한 위치를 점유하느냐를 주된 판단 기준으로 삼는다. 따라서 펑크록의 시대를 열어젖힌 섹스 피스톨즈가 무수한 히트곡을 뽑아낸 퀸보다 비평적으로는 더 대접받는 것이다. 퀸은 그 ‘무(無) 장르’성으로 인해 특정 장르의 개척자 혹은 완성자로서 역할을 했다고 보기 힘들기 때문이다. 아예 후대에 ‘퀸 사운드’를 계승하는 장르가 생겼다면 모를까. 이러한 비평적 관점은 ‘음악성’과는 구별되는 영역이므로 퀸이 비평적으로 푸대접받는다고 해서 열등한 ‘팝’ 음악 그룹이라고 폄하하는 것은 성급한 판단이라 할 수 있다. 워낙 전무후무한 이례적 존재라 계보적으로 파악하기가 힘들었고 그래서 평가절하당했다고 볼 수 있겠다.
퀸의 음악에서 가장 독특했던 요소 중 하나는 거대한 규모의 보컬 하모니였는데, 주로 프레디, 브라이언, 로저 세 명이 반복녹음한 것을 오버더빙 작업을 통해 흡사 합창단의 사운드처럼 만들었다. 덕분에 많은 곡들이 웅장한 스케일의 구성을 가지게 되었는데, 이 역시 의견이 갈려 화려한 스케일에 높은 점수를 준 평단이 있던 반면, 비판적인 입장에서는 지나치게 과장된 음악일 뿐이고 라이브에서 온전한 재현이 불가능하다며 까곤 했다. 특히 안티 퀸 성향으로 악명높은 미국의 《롤링 스톤》지는, 훨씬 간소하고 직관적인 음악을 보여준 The Game에 대한 평가에서 드디어 퀸이 ‘Anthem’이 아니라 ‘Song’을 가져왔다며 비꼬았을 정도.
대중성에 초점을 맞추었던 싱글 히트곡들 외에 앨범 단위로는 주목을 받지 못하는 경향이 있는데, 특히 다채로운 음악과 실험정신이 돋보였던 1970년대 앨범들(2집~7집)이나 1991년 Innuendo 등에서 평단과 퀸과의 좋지 못한 관계가 드러났다.

한 번은 롤링 스톤의 한 기자가 공연 전 사운드체크만 듣고 공연 전체를 본 양 리뷰를 실어놓자 격분한 로저가 항의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내용의 요지는 나는 우리 어머니에게조차 편지는 쓰지 않는데 당신은 너무 쓰레기라 이 편지로 좀 알려줘야겠다는 것. 이로 인해 음악성에 비해 저평가가 심하다는 여론이 많다. 가령, ‘The March of the Black Queen’이나 ‘The Prophet’s Song’과 같은 곡들은 퀸 팬들이나 클래식 락 팬들 사이에선 명곡으로 인정받지만 일반 대중에게 인지도는 시궁창 하지만 Hot Space나 당시 유행했던 팝 사운드에 편승해 다채로움이 없어지고 그들의 전문분야가 아니었던 신디사이저의 롤이 커진 1980년대 앨범들은 상업적 성공 여부와 관계없이 팬들에게도 좋은 소리를 듣지 못하거나 호불호가 갈리는 상황.
그들의 스타일을 계승한 밴드가 거의 없다는 걸로 까는 사람들이 있는데, 앞서 말했듯이 퀸은 장르를 딱히 규정하기 힘들 정도로 여러 유형의 음악을 시도했을 뿐더러 프레디 머큐리의 보컬, 브라이언 메이의 기타 오케스트레이션이나 멀티트랙킹을 통한 보컬녹음 등이 퀸 특유의 사운드를 만들어냈기 때문에 오히려 따라하기 어려운 스타일이라고 보는 게 타당하다.
그럼에도 그들의 스튜디오와 라이브에서의 접근방식은 많은 뮤지션들에게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끼쳐 데프 레파드, 너바나, 드림 씨어터, 익스트림, 푸 파이터즈, 메탈리카, 엘튼 존, 조지 마이클, 건즈 앤 로지즈, 케이티 페리, 킨, 라디오헤드, 뮤즈, 미카, 잉베이 맘스틴, 스티브 바이, 레이디 가가, 싸이, 김경호 등이 퀸에게 받은 영향을 언급하였고, 마이클 잭슨 역시 퀸이 미국에서 투어를 할 때 여러 차례에 걸쳐서 보러 왔을 정도로 그들의 굉장한 팬임을 자처했다. 백스테이지 퀸과 마잭

이들의 라이브 공연과 투어 역시 큰 규모를 과시하곤 했다. 멤버들이 심하게 조명덕후였던지라 수 톤(ton)의 조명과 거대한 무대장비가 뒤따랐으며, ‘We Will Rock You’, ‘We Are the Champions’와 같은 곡들은 관객의 참여를 염두에 두고 쓰여졌는데 이는 “수만의 관객을 한손에 움켜잡는다”고 평가받던 프런트맨 프레디 머큐리의 화려한 스테이지 매너와 곁들여져 빛을 발할 수 있었다.
프레디의 미성에 기댄 원맨 밴드라는 오해도 있는데 이러한 인식은 프레디가 가진 엄청난 보컬능력과 카리스마 때문인데, 특히 공연에서는 프레디의 존재감이 더더욱 커진다. 하지만 그렇다고 다른 멤버들이 뒤떨어지는 인물인 게 결코 아니다. 모두 당대 최고 수준의 실력가들이고 멤버 전원이 차트 1위곡을 작곡한 적이 있는 밴드 이자 멤버 전원이 작곡가 명예의 전당(Songwriters’ Hall of Fame)에 헌액된 최초의 밴드일 정도로 작곡과 연주 양면에 있어 지속적인 역할, 비중 분담이 이루어진, 상당히 보기 드문 ‘민주적인’ 밴드였다. 현대의 수많은 밴드조차도 기타리스트/보컬리스트만 곡을 써서 앨범에 전곡 OO작사/작곡으로 기재돼있는 걸 감안하면 모든 멤버가 작곡을 한 퀸은 2010년대 기준으로도 굉장히 평등하고 민주적인 밴드였다. 다만 각자 말할 게 있다 보니 음악적 견해 차이 및 금전적 문제로 작업 과정에서 서로 싸워대기로 유명했다. 이때 싸운다는 게 말다툼 같은 수준이 아니라, 주위에 있던 가구, 심지어는 소파까지 집어던지면서 싸웠다고 한다. 이후 퀸 말기의 두 앨범에선 모든 곡의 작곡자 명기를 공동작곡으로 통일시킨다.
하지만 분명 퀸의 음악에서 프레디 머큐리의 역할은 엄청났다. 퀸을 본격적으로 궤도에 오르게 한 ‘Killer Queen’과 ‘Bohemian Rhapsody’를 작곡한 것이 프레디였고, 라이브 에이드에서의 퍼포먼스로 침체에 빠져 있던 퀸을 다시금 부흥시킨 것도 그였다. 반대로 1970년대에 비해 1980년대 앨범들의 퀄리티가 저하되었던 것은 프레디 머큐리가 밤놀이에 빠져 일에 소홀했던 것이 원인 중 하나이고, 그의 사망 이후 퀸이 사실상 멈춰 버렸다는 사실도 프레디의 밴드 내 위치를 설명해준다.
앨범들이 발매된 간격 역시 흥미롭다. 1973년 여름 데뷔 앨범을 발매한 뒤 계속 앨범 작업을 하며 이듬해 3월에 2집, 11월 3집을 발매한다. 이후 1,2달간 투어를 돌고 그 후 작업을 하는 식으로 해서 그 뒤 앨범들은 각각 1년씩 주기로 11~12월달에 발매되었다. 프레디의 목이 영 좋지 않았던 7집 투어 후 작업을 하다가 1979년 가을 8집에 수록될 일부 곡들을 발표하기도 한 Crazy 투어를 한다. 이후 1980년 여름 8집을 발매하고 그해 말 영화 플래시 고든의 OST 앨범인 Flash Gordon까지 발매한다. 목 컨디션이 가장 좋았던 8집 투어를 뒤로 하고 1981년 작업을 시작해 그 해 데이비드 보위와의 듀엣 싱글 앨범 Under Pressure를 발매했고, 마침내 1982년 디스코풍이 강한 앨범 Hot Space를 발매한다. 스페이스 투어에서 프레디는 그럭저럭 곡들을 잘 소화해냈으나 앨범의 인기 덕에 주목받지 못했고 2년 후인 1984년 늦겨울 정규 11집 앨범 The Works를 발매했다. 그러나 11집 투어는 프레디의 컨디션이 최악인 공연들이 다수였고 급기야 그룹 해체설까지 튀어나오는 지경에 이른다. 하지만 1985년 라이브 에이드 공연으로 재기에 성공한 뒤 그 해 가을부터 작업을 시작해 1986년 6월 A Kind of Magic을 발매한다. 12집 투어(Magic Tour)가 8월 6일의 네브워스 공연으로 끝을 맺었으나, 화려한 부활을 자축할 틈도 없이 1987년 프레디는 자신이 에이즈에 걸렸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 해를 프레디는 솔로곡인 <Barcelona>, <The Great Pretender>를 만드는 데 보낸다. 1988년, 멤버들도 프레디가 병에 걸렸다는 것을 알았으며, 프레디는 멤버들에게 자신은 죽을 때까지 음악을 하고 싶다고 이야기한다. 그 결과로 1989년 1980년대 최고의 퀸 명반이라 불리는 The Miracle을 발매하고, 연이어 14집 앨범을 작업하기 시작한다. 이 앨범은 당초 1990년 12월에 발매될 거라고 되어 있었으나, 우려했던 프레디의 건강이 급속도로 악화되면서 1991년 2월에 발매된다. 그 후 몇 곡들을 더 작업하다가 결국 프레디는 병을 이기지 못하고 11월 사망한다. 남은 멤버들은 1992년 프레디 머큐리 트리뷰트 콘서트를 열고, 웸블리 공연 라이브 앨범인 Live At Wembley ’86를 발매한 뒤, 프레디의 솔로곡, 데모곡들을 편곡하고, 14집 발매 후 작업한 뒤의 몇 곡들을 엮어 15집 Made in Heaven을 발매한다. 이 앨범을 끝으로, 정규 앨범들은 더 이상 발매되지 않고 있다.
4. 대중적 성공
20세기 전세계를 대표하는 밴드 중 하나이자 대한민국에서 가장 인기있는 록 밴드 중 하나. 퀸에 관심이 없는 사람들도 이들의 노래를 들으면 아 이거~하고 대다수 안다 . 이는 특정 상황에서 어마어마한 포스를 선사하는 마성의 BGM이나 광고에 삽입되어 알려진 명곡이 많기 때문이다. 대표적으로 ‘We Will Rock You’나 ‘We Are The Champions’, ‘Don’t Stop Me Now’, ‘I Was Born to Love You’, ‘Bohemian Rhapsody’, ‘Under Pressure’등이 있다.
잘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1984년 존과 로저가 방한한 적이 있다. 당시 잘 나가던 음악잡지 월간팝송이 비용을 댔다. 잠실 체육관을 둘러보기도 해서 내한 공연 준비가 아닌가 하는 의견도 있었지만, 결과가 없어 팬들이 아쉬워 했다. 여러가지 문제가 있었지만 금지곡 문제가 컸다. ‘Bohemian Rhapsody’, ‘Killer Queen’, ‘Another one bites the dust’ 등을 부를 수 없는 콘서트가 무슨 의미일지… 존과 로저 본인들도 자기들 대표곡들이 한국에서 방송금지되어 있다는 걸 알고 충격을 받았는지 “그럼, 클럽에서도 못 듣는 건가요?” 하고 재차 질문하기도 했다.
여담으로 유난히 현대그룹 광고에 퀸 노래가 자주 삽입된다. ‘Somebody to Love’, ‘Play the Game’, ‘Under Pressure’ 등등. 심지어 현대자동차그룹 계열 현대라이프 생명보험 광고에 ‘Another One Bites the Dust’가 쓰인 적이 있는데, 알다시피 노래 가사 뜻이 ”’한 놈 가고 또 한 놈 가고”
밴드 중에서는 퀸을 전 세계 판매고로 앞서는 팀이 위키백과에 따르면 비틀즈, 레드 제플린, 핑크 플로이드뿐인데 이와는 다르게 차트마스터처럼 퀸을 역대 5위, 밴드 중에선 비틀즈 다음이라고 보는 곳도 있다. 인증 판매고만 1억 장이 넘으며 추정 판매고는 최대 2억 4천만장에 이른다. 놀라운 점은 퀸은 전성기가 한참 지났는데도 차트마스터에 의하면 역대 최다 디지털 싱글 판매 순위에서도 5,800만건의 다운로드를 기록하여 22위를 기록했다는 것.. 16위에 오른 마이클 잭슨을 제외하곤 퀸 세대 이전 혹은 동시대 뮤지션들 중에는 퀸이 순위가 제일 높다. 미국내 디지털 음원 다운로드는 RIAA 공식 인증 2,150만회로 역대 46위인데 여기서도 15위에 오른 마이클 잭슨을 제외하곤 퀸 세대 이전 혹은 동시대 뮤지션 중엔 퀸이 가장 높은 수치를 보이고 있다.
락 밴드 순위를 매기면 비틀즈, 롤링 스톤즈, 레드 제플린 다음의 4위권을 핑크 플로이드와 다투곤 하는데, 특히 스포티파이와 위키피디아 조회수 등을 고려하여 USATODAY에서 매긴 순위에서는 1위로 등극했다.데이터 주의보헤미안 랩소디 개봉 후의 조사 결과라는 점을 고려할 필요는 있다.
다만 비틀즈, 레드 제플린, 핑크 플로이드, 롤링 스톤스 등 자국의 다른 S급 록밴드들에 비해 미국에서의 성적이 유독 낮은 건 사실이다. 대신 미국 다음 3위 규모의 시장인 일본에서 총 300만장 이상의 판매고를 올렸다. 일본에서 레드 제플린, 핑크 플로이드, 롤링 스톤스는 총 100만장을 넘기지 못했다. 무엇보다 퀸은 본국인 영국에서 가장 활약했고, 영국도 세계 2위 규모의 음악시장으로 결코 작은 시장은 아니었다. 참고로 퀸은 영국차트에서 싱글과 앨범을 합쳐 가장 오랫동안 차트에 머문 뮤지션 순위로 2018년 10월 기준 1965주 동안 머물러 엘비스 프레슬리, 마이클 잭슨, 클리프 리차드에 이어 4위를 기록 중이다.
그들의 음악은 지나치게 하드하지 않으면서 다양한 장르에 분포하고 있었다. 히트곡들은 강한 멜로디를 바탕으로 한 대중성을 갖추고 있었으며, 프런트맨 프레디 머큐리가 양성에게 모두 어필했기 때문에 다양한 연령, 성별의 팬층을 확보할 수 있었다. 또한 항상 투어의 영역을 넓혀나가면서 보다 여러 국가와 지역에서 베이스를 다질 수 있었다. 결론적으로 퀸은 유럽, 남미, 일본 등지에서 엄청난 인기를 누린 밴드였고 특히 자국인 영국에서의 기반이 매우 탄탄했다. 10주년 기념 컴필레이션 앨범인 Greatest Hits는 영국내에서만 600만 장이 팔림으로써 영국 역사상 가장 많이 팔린 앨범으로 집계되었다.
2012년 런던 올림픽 폐막식에서 프레디 머큐리가 사망한 지 20년이 넘음에도 생전 영상으로 등장하였다.
그리고 퀸의 전기영화 보헤미안 랩소디가 9억달러(약 1조원)의 수익을 올리며 그들의 세계적인기를 새삼 체감시켰다.
4.1. 미국 시장
하지만 미국에서의 실패로도 널리 알려져 있는데 사실 퀸은 미국에서 스타덤에 올라선 1970년대 중후반 이후부터 앨범 The Game이 빌보드 1위를 차지한 1980년대 초반까지 꾸준한 인기를 누렸다. 이후 미국시장에서의 급격한 몰락 원인에 대해선 의견이 분분하다. Hot Space의 실패가 큰 타격이었고, 1984년 ‘I Want to Break Free’ 뮤비에서 멤버들의 여장이 보수적인 미국인들을 등 돌리게 했다고 보는 시각이 많다.

또한 1984년을 기점으로 퀸은 미국에서의 투어를 중단해버리는데 프레디 머큐리가 “앨범이 크게 성공하지 않는 한 미국투어를 하지 않겠다”고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프레디는 미국 진출을 주 목표로 두지는 않았다. 이미 떼부자가 된 프레디가 나이 40 가까이 돼서 어딘가에 재도전할 필요성을 못 느꼈던 걸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이 시기부터 퀸은 미국시장 재건을 위한 의지를 보이지 않았으며 자연스레 미국의 언론이나 라디오의 관심에서 멀어져 갔다. 그리고 그 시기부터 미국 대중음악의 메인스트림이였던 디스코, 펑크 등 댄스음악들을 선두로 한 흑인음악은 시도하지 않았고 북미를 제외한 유럽이나 남미, 아시아등에서 여전히 큰 인기를 얻으며 활약했다. 11집 투어는 북미를 제외한 유럽, 남미, 남아프리카공화국, 아시아(일본)를 모두 돌며 투어를 진행했다.
그렇지만 기본적으로 퀸의 음악 자체가 미국과는 맞지 않았다고 보는 게 타당할 것이다. 영국차트 1위를 차지했으며 퀸 음악의 방향성을 잘 보여주는 Bohemian Rhapsody(9위), Under Pressure(29위)는 모두 미국차트에서 상대적으로 부진했으며 영국차트에서 준수한 성적을 가진 곡들은 60위권까지 밖에 가지 못했다. 퀸의 둘 뿐인 미국 빌보드 넘버원인 ‘Crazy Little Thing Called Love’-(엘비스 프레슬리 스타일의 로큰롤)와 ‘Another One Bites the Dust'(디스코 풍 펑크 스타일의 흑인 음악)는 기본적인 퀸의 스타일과는 매우 동떨어진 곡이다. 보랩이 발매될 75년 당시 빌보드 1위는 보랩과는 음악적으로 상극인 KC & 선샤인 밴드의 소울 넘버 ‘That’s the Way (I Like It)’이었으니, 미국 시장과 퀸의 취향 차이를 짐작할 수 있다.
그래도 최근 들어서는 미국에서 퀸의 인기가 상당히 높아졌다고 볼 수 있는 여론조사 결과도 나왔는데 2018년 여름 미국의 한 관공서에서 2,000명의 미국인들을 대상으로 실시된 ‘음악을 들었을 때 가장 기분을 좋게 만들어주는 뮤지션’ 조사에서 퀸이 비틀즈, 이글스, 마이클 잭슨에 이어 4위에 오른 것이다.
<출처> 나무위키